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리 3세 (문단 편집) === 트베르의 미하일과의 갈등 === 그의 아버지 다닐이 1303년에 죽은 후, 유리는 모스크바의 대공이 되었고, 그의 삼촌인 트베르의 미하일과 함께 블라디미르의 대공 (동북의 왕자들 중에서 가장 높은 위치)이라는 칭호를 놓고 다퉜다. 다닐은 한 번도 블라디미르의 대공이였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아들 유리를 포함한 그의 후손들은 전통적인 승계 관행에 따라 블라디미르의 왕좌에 대한 정당한 주장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다음 해인 1304년 7월 27일에 고로데츠의 안드레이가 사망했을 때 황금 무리의 칸인 토흐타가 트베르의 미하일에게 대공 직함을 부여한 이유이다. 미하일은 황금 무리의 수도인 사라이로 갔고, 칸은 그를 대공으로 올려놓았다. 그의 조카 유리는 이 임명에 반기를 들었지만, 1305년과 1308년에 모스크바에 대항하여 트베르의 미하일이 벌인 두 차례의 군사 작전은 유리가 칸의 결정에 따르도록 강요했다. 트베르의 군대는 페레슬라블과 모스크바 자체를 포위했다. 한편, 유리는 랴잔의 콘스탄틴 왕자의 살해를 주선했다. 이 불운한 통치자는 1302년에 유리의 아버지에게 붙잡혔고 그 이후로 모스크바에 투옥되었다. 랴잔이 그러한 야만 행위에 충격을 받은 동안, 유리는 콜롬나의 핵심 랴잔 요새를 모스크바에 합병했다. 그는 또한 이전에 스몰렌스크의 왕자들의 소유였던 모하이스크를 점령했다. 1314년까지, 유리는 메트로폴리탄 피터로부터 지원을 확보했고 트버에 대항하여 노브고로드와 군사 동맹을 맺었다. 이제, 그는 무리에서 트베르의 미하일에게 도전할 만큼 충분히 강하다고 느꼈다. 1315년, 유리는 황금 무리로 갔고 그곳에서 2년을 보낸 후, 우즈베크 칸과 동맹을 맺었다. 유리는 유리와의 결혼 때문에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한 타타르족 공주인 칸의 여동생 콘차카와 결혼했고 그녀의 세례명으로 "아가피아"를 채택했다. 우즈벡 칸은 미하일을 폐위시키고 유리를 블라디미르 대공으로 임명했다. 타타르족의 대군과 함께 모스크바로 돌아온 유리는 트버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유리의 군대는 패배했고 그의 동생 보리스와 그의 아내는 포로로 잡혔다. 그 후 그는 노브고로드로 도망쳤고 평화를 위해 소송을 걸었다. 그 때 아직도 트베르에 인질로 잡혀 있는 그의 아내는 예기치 않게 죽었다. 유리는 이어지는 혼란을 이용했고 미하일의 명령에 따라 독살되었다고 칸에게 발표했다. 우즈벡 칸은 두 왕자를 모두 사라이로 소환했고 재판 후, 1318년 11월 22일 미하일을 처형했다. 우즈베크 칸의 호의에 의지했고 이익을 얻었던 유리는 다음 몇 년 동안 (1318–1322) 블라디미르의 대공이 될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